얼마전까지 부모님는 현금을 은행에 적금으로 넣어두고 그 이자를 받아 생활하셨다. 자식들이 가끔씩 용돈을 드리기는 했어도 그것은 부모님의 과외 수입이었지 고정 수입은 아니었다. 이자로만 생활하시지 말고 원금도 찾아서 하고 싶으신것. 쓰고 싶은것 쓰시고 사시라고 자식들이 얘기해도 엄마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시면서 아자로만 생활하시고 원금은 쓰시지 않으셨다. 아마도 당신 살아생전에는 이자로만 생활하시다 원금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이신것 같았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막내 며느리인 아내는 같은 여자 입장에서 늘 안스러워 했다. 살아생전 아끼느라 호강한번 못하시고 사셔서 이제는 돈이 있어도 쓰실줄도 모르신다고. 아내는 쓸돈이 충분하면 넉넉하게 쓰실거라며, 내가 한국에 출장을 갈때면 꼭 시어머니 용돈은 자기가 챙겼다. "자기가 주는 것이라는 것을 꼭 말씀드려라" 하면서 생색내는것도 있지 않고.
엄마의 그런 원칙이 2018년 3월 이후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이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바뀌게 됬다. 아버지의 치매가 이미 중증으로 진행되 엄마가 돌보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여서 '이러다간 엄마가 먼저 돌아 가시겠다'는 생각이 들어 요양병원으로 모셨는데, 정신이 없는 아버지는 적응을 잘 못하셨다. 식사도 잘 못하시고 저녁이면 잠을 안주무시고 시끄럽게 하니까 병원측에서는 때때로 신경 안정제성 수면제를 주사하는 눈치였다. 낮에 찾아뵈면 아버지는 반쯤 풀린 눈으로 축 늘어져 계셨다. 이러다간 '얼마 못 사시겠구나' 생각은 들면서도, 그렇다고 다시 모셔올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그동안 자식들사이에서 '터부'시 되왔던 '아버지 사망시 상속세 문제'를 가족들과 의논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모든 부동산이 아버지 명의로 되어있고 현금의 반도 아버지이름으로 적금이 들어있어, 아버지 사망시 강남 아파트 한채를 상속세로 내야한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적잖히 충격을 받으시고 못 믿는 눈치셨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미국변호사인 나에게 따지셨지만, 나도 뭐라고 딱히 엄마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설명드리지 못했다 "그냥 법이 그래요" 라고 대답해 드릴 뿐이었다. 혹자는 재산이 있으면 상속세를 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국민의 의무라 하겠지만, 엄마 입장에선 아버지와 함께 평생 열심히 농사지며 안쓰고 아껴서 장만한 전답과 현금을 상속공제금액을 제외하고는 반을 뚝 잘라 세금으로 낸다는 것이 법을떠나 당신의 입장에선 얼울하신것 이었다. 미국에 있는 자식들 입장에서도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도심지의 부동산도 아니고, 공시가만 부풀려진 매매가 용의치 않은 시골의 전답을 상속 받고 강남 아파트 한채값의 상속세를 현금으로 내야 하는것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현실적인 문제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까, 엄마의 생각이 바뀌셨고 그때부터 엄마의 통큰 '씀씀이'가 시작됬다. 먼저 손주들이 의대에 가거나 대학원에 진학할때, "이건 할머니가 주는거니까 학비에 보태써라" 하시면서 손자. 손녀들에게 목돈을 주셨다. 그리고 이미 공부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고있는 손주들에게는 결혼할때 줄 것임을 은연중에 암시 하셨다. 막내 며느리의 용돈도 그때를 깃점으로 중단됬다.
나는 일년에 4-5번 한국으로 출장을 가는데 요즘은 출장비로 현금을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현금으로 쓸일도 별로 없고, 또 현금으로 지출하게 되면 영수증도 챙겨야 하는게 불편해서 경비는 주로 크래딧카드로 쓰고 현금은 비상금 정도 지갑에넣고 다닌다. 출장간 업무를 마치면 금요일에는 시골 부모님댁에서 지내다가 일요일에 출국을 하곤 하는데, 부모님댁에 갈때쯤이면 그나마 조금있던 한국 돈도 거의 다 떨어지곤 한다. 그런 상황을 아시는지 엄마는 내가 시골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이라도 한다 하면 한사코 한국돈을 쥐어 주신다. '남자는 지갑이 두터워야 기를 편다' 하시면서. 촌로이신 엄마는 크래딧카드 쓰는 것을 빚지는 것으로 여기시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현금이 없어서 크래딧카드를 사용하는것 쯤으로 생각하시는것 같다.
올 2월 출장갔다 시골에 들렸을때 일이었다. 서울에 사시는 장인어른이 고관절 수술을 하셔서 출국전 꼭 뵙고 와야하는 상황이었다. 엄마에게 말씀드리니까, 엄마는 나에게 제법 두터운 봉투를 내어 놓으셨다. "달러 환전하지 말고 사돈 어른 용돈을 이 돈으로 드리고 지갑에 충분이 넣고 다녀라" 하시면서. 아마도 탁자위에 얹어논 아들의 홀쭉한 지갑을 보신 모양 이었다. 나는 "됬어" "필요없어"고 하면서도, 사실 오백불밖에 현금이 없어서 장인께 용돈을 얼마를 드려야하나 고민하던 차라, 두 세번 사양후에 마지못해 받는 척하면서 엄마가 건내주는 봉두를 받았다.
미국에 돌아와 아내에게 엄마한테 돈받아서 장인어른 용돈 드린 얘기를 얘기를 하니까,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면서 "오십이 넘어서 엄마에게 삥을 뜯냐?" 하면서 면박을 줬다. 그러면서 둘째아들 Nick이 나를 닮아서 자기한테 삥을 뜯는다고 삥뜯는것도 유전인것 같다고 깔깔댔다.
아내는 써야할곳에 돈 쓰는데는 전혀 인색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절대 헛투로 돈을 쓰지는 않는다. 그런 그녀도 둘째 아들 Nick 한테는 수시로 삥을 뜯긴다. 첫째와는 달리, Nick은 아는 사람도 많고 씀씀이가 헤픈 정도를 넘어 '가호'가 장난이 아니다. 두 아들들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 아내는 본인 크래딧카드를 애들앞으로 해주면서, '밥은 굶지말고 필요할때 써라'고 가이드라인을 정해 주었는데, 둘째는 학생 수준의 씀씀이를 훨씬 넘어 때때로 아내가 차지된 금액을 보고 깜짝놀라 둘째에게 전화를 하곤 했다. 그러면 둘째는 태연하게 '친구들한테 술한잔 샀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 둘째를 내 앞에서는 "애비 닮아서 그래"하고 흉보는것 같으면서도 내심 그렇게 걱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닮아 소심하고 돈을 아끼는 성격의 큰애 보다는, 전혀 다른 성격의 나를 꼭 빼닮은 둘째에게 삥뜯끼는게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아마도 '애가 돈의 무서움을 모르고 커서 스포일 시키는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감보다는 여유롭지 못했단 우리들의 대학시절을 반추하며 비슷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둘째에게 엄마로써 '그렇게 해줄수 있다는 것에 대한 행복감'을 느끼는것 같았다.
쥐가 고양이를 걱정해주듯 나는 엄마에게 '삥'을 을 뜯으면서 엄마의 '삥뜯기는 행복'을 공감할수 있을것 같다. 시골에서 시부모 모시고 올망볼망 오남매 키우며 어렵게 살었던 시절, 미국으로 이민가서 일주일 그로서리 지출로 $50불 상한선을 긋고 생활하던 시절, 왜 엄마라고 자식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그때는 해주고 싶어도 해줄수 없었는데, 한국의 조세법 때문이라도 이제는 해줄수 있다는 엄마의 '주는 행복함'을 어느정도 알 나이가 된것 같다. 사실 그래봐야 삥뜯는 금액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랑도 줄때가 더 행복하다고 엄마는 당신이 아직도 자식들에게 용돈을 줄수있다는 뿌듯함, 당신 기준으로 돈을 쿨하게 쓰고 있다는 만족감, 그리고 용돈으로 전해지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려 나는 앞으로도 엄마의 삥뜯기는 행복을 막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