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며느리
큰 며느리
큰 아들 Alex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내와 나는 약속이나 한듯 서로 말이 없었다. 부모로써 처음 겪는 자식의 결혼이 당연히 기뻤지만, 마음 한켠으로 표현 할수 없는 긴장감도 함께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정적을 깬 것은 아내의 뜬금 없는 혼잣말 이었다. “양수가 터져 병원에 가는 길에 오빠가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갔어”. 아내는 지금 그 애가 태어난 날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던것 같았다. 양수가 터져 병원에 가는 와중에도 우리들은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을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고 , 아이의 이름도 병원 가는 길에 지을 정도로 부모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부모가 됬다. 그때의 기억이 엇그제 같은데 오늘 그 아이가 결혼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첫 아이에 대한 환상이 크듯, 우리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취학 전에는 아이가 천재인줄 알고 호들갑을 떨었고, 중학교 다닐때 까지만 하더라도 하버드대학 정도는 쉽게 갈줄 알았었다. 그런데 막상 지나고 보니까, Alex는 천재도 아니었고 공부나 예체능 쪽으로 특출난 아이도 아니었다. 명작 소설 읽는 것 보다는 만화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하고, 운동 보다는 비디오 게임을 더 좋아 하는, 평범에 가까운 아이였다. 그러나 Alex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아이가 결이 곱고 착한 심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자라면서 다소 극성스러운 남동생을 한번도 쥐어 박은 적이 없었고, 여지껏 친구들과 싸우거나 욕설 한마디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키우는 강아지가 아프면 밤잠을 설쳐가며 돌봤고, 여름 방학때면 빠짐 없이 남미 오지로 선교를 다녔다. 그리고 의사가 되어 그들을 도우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순수하고 가슴이 따듯한 청년이다.
성탄절을 며칠 앞둔 2017년 어느날, 한껏 들뜬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Alex는 우리 부부에게 Kari와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곤 그 주말에 Kari 부모님을 찾아가 둘이 사귀는 것에 허락을 구했다. 가서 뭐라고 애절하게 말했는지 안사돈이 눈물까지 보였다고 했다. 사실 Kari는 아내 베프의 딸이다. Kari는 어려서부터 우리를 'Uncle Brian', 'Aunt Sun'으로 불렀고, 우리는 친 조카처럼 Kari를 대했다. 성격이 활발하지는 않지만 구김없이 밝고, 무었보다도 타인을 배려할줄 아는 심성이 고운 아이이다. 아내는 여지껏 연애 한번 못해본 "쑥맥인 아들이 큰 건을 하나 했다"며 좋아했고, Kari를 어릴때부터 며느리 감으로 찜한 나로써는 더없이 흥분되는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예전에 나의 아버지는 큰 며느리 될 형수님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셨다. 예비 큰 며느리가 몇달 후면 미국에 들어와서 볼텐데도 아버지는 큰 며느리와 '정 붙인다'고 하시면서 지갑에 큰 며느리 사진을 넣고 다니셨다. 그때는 아버지가 공장에서 허드렛일 하시며 힘들게 사셨을 때인데, 고단한 일과가 끝나고 귀가하셔서 쉬시다가도 지갑에서 예비 큰 며느리 사진을 꺼내 보시며 미소 지으시곤 했다. 나는 Kari를 아기 때부터 보아 왔고 예뻐했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처럼 큰 며느리 '정 붙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아들의 여자 친구인 Kari를 이미 큰 며느리가 된냥 티나게 예뻐하고 주책맞게 행동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앞서 말했듯 Alex는 대학을 졸업하고 Kari를 만날 때까지 여자 친구가 없었다. 지도 선교사로 부터 학창시절엔 연애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이성에는 그닥 관심을 갖지 않는 눈치였고, 또 관심을 끌려고 멋부리고 다니지도 않았었던 것 같다. 그런 아이가 Kari와 사귀기 시작하고 부터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몇일 Kari를 보지 않으면 'Kari가 보고 싶다'며 아버지인 내 앞에서도 오글거리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둘다 아직 어리고 첫 사랑이다 보니까 사귀면서 티걱태걱 할줄 알았는데 그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아이들은 서로 둘도 없는 오누이 같은 친구였고, 남들 보기에도 아름다운 커플 이었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좋아했고, 같이 있는 자체 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했다. Alex가 의대에 떨어져서 Kari부모님에게 볼 면목이 없어 할 때도, Kari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둘이 같이 살 조그만 방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며, Alex가 힘든 공부하며 스트레스 받지 말고 좋아하는 쿠킹을 하며 살면 좋겠다고 했다. 아직 어려서 철이 없는 건지, 아니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인지 모르겠다. 분명한건, 미래의 누구 누구인 Alex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현재의 Alex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갓 스물을 넘긴 아이의 사랑이 삼십년 가까이 산 우리 부부의 사랑보다 더 깊고 넓은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어찌 Kari를 예뻐하는 마음을 숨길수 있으랴?
결혼식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해서 그야말로 '스몰웨딩' 이었다. 당초 200명 정도 하객에 맞춰 준비한 식장에 총 14명의 양측 직계 가족만 참석하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휑한 분위기였다. 사회자의 재치있는 유머도 없었고, 친구들의 감동적인 축가도 없었다. 분위기를 띄우는 음악, 웃음을 자아내는 영상이나 감동적인 이벤트도 없었다. 그러나 어수선하지 않았고, 예식 내내 오롯이 주인공인 신랑 신부에게만 집중할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결실을 맺는 Kari 와 Alex가 너무도 행복해 보여 부모로써 더할 나위없이 뿌듯했고 또 행복했다. 새 식구인 큰 며느리를 맞는 오늘, 왠지 큰 형수 사진을 꺼내 보시고 미소를 지으시던 아버지 옛 모습이 떠올라 주책맞게 자꾸 목이 메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