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콜라택

아버지와 콜라택

by 황가네 막내 (Posts: 0) » about 3 years ago

내가 고등학교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에는 ‘미팅’이라는게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하지 않지만, 처음보는 이성에게 호구조사를 하면서 꼭 빠지지 않는 질문중에 하나가 상대방의 취미를 묻는 것이다. 취미의 사전적 의미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하는것’인데, 그때만 하더라도 취미의 종류가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고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다고 하는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교양 수준을 간접적으로 표현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당구치고 술마시고 고스톱치는 것을 좋아해도 그런 것들은 취미라고 하지 않고, ‘우표수집’, ‘독서’, ‘여행’, ‘등산’, ‘영화감상’, ‘음악 감상’ 등등 고상해 보이는 취미에 집착했다. 미국에서는 왠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면 생뚱맞게 취미(hobby)를 물어보지 않는다. 그냥‘What do you do for fun?’ 하고 묻는것이 일반적인데, 상대방이 여가시간에 즐겨 하는 일이 무었인지를 묻는 것이다. 따라서, 친구들과 비디오게임하는게 즐거우면 그것이 취미이고, 운동하는 거나 클럽가서 술먹고 춤추는게 좋으면 그게 취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취미는 그동안 많이 바뀌었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것이다. 지금은 시간 남을때마다 친구들과 테니스치고 어울려서 소주한잔 하는것이 나의 취미다. 아내는 맛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 하게나, 여행하고 쇼핑하는것 등등을 즐기는것 같다. 같이 살다보면 상대방이 특별이 뭐를 좋아하는지 어느정도는 알수있는데, 정작 오십년을 가족으로 지내온 부모님의 취미는 잘 모른다.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부모님의 취미 생활을 눈여겨 보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사셨던 까닭에 부모님이 일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취미 생활을 특별히 즐기셨던 기억이 없다.
 
어릴적 나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덩치도 크고 운동도 잘할것 같아 보였다. 운동회때면 여덟명씩 달리기를 하고 3등까지 공책이나 연필같은 부상을 줬는데, 줄을 어떻게 서건 그당시 나는 달리기를 못해서 매번 부상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라도 와서 이어 달리기를 하면 부상을 받을수 있을거라 생각을 했었는데, 아버지는 농사일이 바빠 한번도 운동회에 오시질 못했다. 당연히 나는 아버지가 달리기 하시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고, 스포츠 하시는것도 보질 못했다. 아버지는 하다못해 그시절 시골분들이 즐겨 하시던 화투나 윳놀이, 낙시같은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즐기신다 싶었던 것이 외출하고 돌아오실때 삼거리에서 막걸리를 드시고 흥얼거리시며 돌아오는게 전부였다. 아마도 아버지는 평생 취미 생활을 생각할 정도로 시간적. 금전적인 여유가 없으셨던게 아닌가 싶다.
 
그런 아버지가 동내 아줌마한테 춤을 배우신다고 첫애를 봐주러 시카고에 오신 엄마한테 들었다.그 당시는 부모님이 미국 이민 생활을 정리하시고 한국으로 역이민 한지 몇년 후였는데 그때 아버지 연세가 61세 정도 이셨다. 엄마는 3개월 정도 애를 봐주실 예정으로 오셨는데, 우리가 힘들어하니까 귀국을 연장하고6개월이나 애를 돌봐 주셨다. 엄마가 ‘아버지가 식사나 잘 하시는지 걱정이 된다’며 가봐야 될것 같다고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편하자고 조금 더 있다 가시라고 엄마를 붙들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버지 식사가 걱정되서 간다고 하신게 아니라 외간 여자와 춤 연습하는 아버지가 걱정되서 가시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아버지 엄마를 할아버지 할머니로 여겨 이상한 생각이 안들었는데, 이제 나도 오십이 되고 보니까 아버지 엄마가 그때는 그렇게 늙으셨던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춤추는 모습은 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처음 볼수 있었다. 평택에 있는 뱅큇홀 같은데서 칠순잔치를 해드렸는데, 예정된 일정이 끝나고 아버지를 필두로 반주자의 음악에 맞춰 손님들이 가라오께를 하고 또 노래에 맞춰 지루박 같은 춤을 추셨다. 그날의 주인공인 아버지는 무대를 왔다갔다 하면서 동내에서 춤 좀 춘다는 아줌마들과 돌아가며 그동안 배운 춤솜씨를 마음껏 뽐내고 계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그동안 동내 친구분들과 일주일에 두세번 평택에 있는 콜라택에 다니셨다고 했다. 회갑연에 주인공이 춤추는게 흉이 될것은 없겠지만, 춤 못추는 엄마는 덩그러니 혼자 앉아 계시고  아버지는 다른 아줌마들과 돌아가며 좋다고 춤추시고 계시니까 미국물을 오래먹은 자식 입장에선 이해가 잘 안가는 광경이었다. 
 
그후로 몇년후, 나는 한국에 출장갔다가 여느때와 같이 시골 부모님댁에서 몇일을 보낸후 출국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평택까지 버스를 타고가서 공항버스로 갈아 타고 인천공항에 가곤 했는데, 그날따라 아버지가 주섬주섬 양복을 챙겨입으시더니 평택까지 같이 가시겠다고 하셨다.엄마는 옷좀 깨끗이 입고 다니라고 아버지한테 잔소리를 하시더니, “요즘은 손잡아주는 기집들이나 좀 있어?” 하고 아무렇지않게 물으셨다. 아버지는 “그 여편네가 요즘은 잘 안나와” 하시면서, 그 여자분이 없어서 춤 파트너가 없는게 아쉬우신건지 아니면 그분이 어디나 아프지나 않은가 걱정하시는건지 모르겠다는 말투로, “지난번엔 그 여편내도 안오고 다른 여편내들도 안잡아 줘서 그냥 하루종일 앉아 있다 왔어” 하고 넋두리를 하셨다. 엄마는 “그 청소하는 기집 이제 안나와?”하고 물으셨는데,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을 안하셨고 엄마는 구지 대답을 기다리시지도 않으셨다. 
 
나로써는 이해할수 없는 엄마와 아버지의 대화를 뒤로한채 아버지와 평택가는 버스에 올랐다. 평택까지는 50분 정도 걸리는 버스 안에서 나와 아버지는 일상적인 대화 몇마디 나눴을뿐, ‘왜 엄마 놔두고 혼자 춤추러 다니시냐고’, ‘엄마는 정말로 아버지가 이러고 다니시닌게 괜찮으신거냐’고, ‘도대체 콜라택이 어떤데냐’고, ‘다른 아줌마들과 춤추는게 그렇게 좋냐’고, ‘자식들을 봐서라도 다른 고상한 취미를 가져 보시는게 어떻겠냐’고, 묻고 싶은 것도, 따지고 싶은것도 많았는데 왠지 묻지도 따지지도 못했다. 한편으로는 아내인 엄마도 허락했는데 자식이 나서서 아버지의 취미활동에 토를 단다는 것도 좀 그랬고, 또 한편으로는 평생 농사짓고 고생만 했던 아버지가 분칠한 환갑 넘은 어린 할머니들과 춤추시고 싶어 하시는게 같은 ‘남자’로써 안스럽게 느껴져서 아무 말도 못했었던것 같다.
 
평택역에 도착해서 아버지와 인사를 하고 콜라택을 향해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인파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뒷모습은 단정하지 않은 하얀 머리카락에 뒷목이 검게 그을린, 디스크 수술 후유증으로 다리를 저는, 그냥 왜소한 칠십대 후반의 시골 노인이었다.
 
얼마전 아버지가 85세 생일을 요영원에서 맞았다. 5년째 중증 치매를 앓고 계시고 이제는 걷지를 못하셔서 침대에 누워 계시거나 휠체어에 의존해 계신다. 이제 아버지의 취미는 먹는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 취미마저 얼마의 세월이 지나면 없어질 것이다. 아마도 엄마는 그런 인생의 끝을 이해하셔서 아버지가 콜라택 가시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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